
성서읽기
위 부분의 글은
디이트리히 본회퍼, 신도의 공동생활, 문익환 옮김, 서울: 대한성서공회, 1993, pp.64-72에서 옮겼습니다. 소제목은 읽는 사람들을 위하여 원문에 없지만 붙였습니다.
64쪽
시편의 기도로 시작된 가정 예배는 찬송으로 끝나기 전에 성서를 읽는 순서가 있어야 합니다.“마음을 모아 성서를 읽으라“(딤전 4:13) 성서를 함께 바로 읽게 되는 데에 극복해야 할 해로운 선입관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거의 모두 성서를 읽을 때 바로 오늘이라는 날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뿐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자라 왔습니다. 그래서 성서를 읽는다는 것을 보통 하루의 생을 이끌어가는 데 도움이 되는 짧은 몇 구절을 뽑아 읽는 것을 만족합니다. 그런 까닭으로 해서 모라비안 교단에서 박아낸 하루의 성구는 사용하는 사람마다 참으로 은혜가 되어 왔다는 것은 물을 필요조차 없습니다. 교회가 투쟁해 나가던 그 당시에야 말로 그것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새삼스레 놀랐던 것입니다. 그에 조금도 못지 않게 의심할 여지 없는 것은, 지침이 되고 생의 표어가 되는 짧은 성구가 성서를 통독하는 것 대신이 될 수 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루의 표어는 오고 오는 시대를 일관해서 마지막 날까지 성서로서 엄연히 남을 책일 수는 없습니다. 성서는 표어는 아닙니다. ‘하루의 양식’일 수도 없습니다.
성서에 대한 본회퍼의 생각:
65쪽
성서는 전 인류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어느 시대에나 타당한 것입니다. 성서는 마디마디 떨어지는 구절들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전체로서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전체로서 성서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입니다. 그 끝없는 내적인 관련에서 비로소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충분한 증언으로서 이해됩니다. 다시 말해서 신약과 구약의 관계, 약속과 성취의 관계, 제사와 율법의 관계, 율법과 복음의 관계, 십자가와 부활의 관계, 신앙과 복종의 관계, 가짐과 기다림의 관계에서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함께 모이는 경건한 모임에서 시편의 기도를 드리는 외에 구약과 신약을 오래 읽는 일이 빠질 수 없습니다.
성서읽기:
그리스도인 가정 예배 때에 아침과 저녁으로 구약을 한 장,신약을 적어도 반 장을 듣고 읽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처음 해 보면, 물론 이같이 얼마 안 되는 것도 지나친 요구로서 거의 누구나 견디기 어렵다고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같은 많은 사상과 그와 관련된 많은 것을 흡수하고 간직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우리가 진지하게 소화시킬 수 있는 한도 이상 읽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는 것이 된다고 합니다. 이런 반대에 부딪혀서 사람들은 몇 구절씩 읽는 것으로 다시 쉽게 만족해 버립니다.
그러나 사실은 여기에야말로 중대한 잘못이 은폐되어 있습니다.
66쪽
우리 성장한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의 한 장도 계속해서 읽고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합시다. 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더할 나위 없는 수치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읽는 것의 내용을 그대로 안다고 하면 한 장쯤 아무 어려움 없이 읽어 내려 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물며 성서를 손에 펴들고 남과 함께 읽을 때에랴! 그러면서도 우리가 승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성서는 아직 모르는 것 투성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잘 모른다는 잘못을 인정함과 동시에 우리는 여태껏 해오던 것을 열심히 진실하게 회복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 아니겠습니까? 목사들이야말로 이 일에 전력을 기울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반대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함께 보내는 경건한 모임의 목적은 성서나 배우는 데 멎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성서연구의 목적은 경건한 모임 밖의 시간에 해야 할 속된 것이 아니냐 하는 생각입니다. 이런 반대를 해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반대하는 까닭은 경건한 모임이 무엇이냐는 것을 잘못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각기 이해하는 정도를 따라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들어야 합니다. 어린이는 가정 예배에서 처음으로 성서의 말씀을 듣고 배웁니다. 어른이 된 그리스도인은 거듭 배움으로써 더 잘 알게 될 것입니다. 스스로 읽고 듣는 것으로 배울 만큼 배웠다고 할 때는 결코 오지 않을 것입니다.
67쪽
어린 그리스도인들뿐 아니라, 다 자란 그리스도인들도 성서를 읽는 것이 너무 지루하고 이해 못할 것이 너무 많다고 투덜거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아무리 짧은 구절을 읽어도‘너무 길다’고 느낄 것 같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성서는 한 전체이어서 거기 있는 한 낱말이나 한 문장도 전체에 대해서 아주 복잡한 관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 하나를 넘어서 전체를 한 눈에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서 전체, 따라서 그 가운데 있는 어느 한 낱말도 우리의 이해를 넘어가고도 남음이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이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실은 또한 에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에게 “모든 지혜의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골2:3)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성서는 단순히 격언이나 생활 철학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기 때문에 성서를 읽는다는 것은 언제나 좀 ‘너무 길다’고 말입니다.
성서는 몸(corpus),한 생명체이기 때문에 가정 예배에서 성서를 읽을 때에는 계속해서 읽는 방식이 고려되어야 합니다. 역사서들,에언서들,복음서들,서간집.계시록을 서로 관련을 가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고 들어야 합니다.
68쪽
이 책들은 듣는 성도의 무리를 이스라엘 백성들의 놀라운 계시의 세계 속에 들어서게 합니다. 예언자들과 사사들과 왕들과 제사장들과 함께 전쟁과 축제와 제사와 고난을 같이 겪으면서 말입니다. 믿는 성도의 무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시던 이야기와 그가 받으신 세례, 그가 행한 기적과 베푸신 가르침, 그가 받으신 고난과 죽으심과 다시 사심에 이끌려 들어가서 세계의 구원을 위해서 이 지상에서 일어난 바로 그 사건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여기서 적어도 자신을 위한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것입니다.
성서의 책들을 계속해서 읽는 사람들은 들을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하나님께서 단 한 번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행하신 바로 그곳으로 휘몰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읽을 때에야말로 성서의 역사서들은 우리에게 아주 새로운 것이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일찍이 일어난 그 사건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스스로를 잊으며 또한 잃으면서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거쳐서 요단강을 건너 기다리던 땅에 다다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과 함께 의심과 불신에 빠져 들어가고, 징벌을 받아 뉘우치고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신실하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신실하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것은 모두 한낱 꿈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실존에서 벗어나서 지상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거룩하신 역사 속에 옮겨 앉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손을 내미셨고, 거기서 오늘도 고난과 죄에 빠져 있는 우리에게 진노와 은총을 가지고 손을 내미셨습니다.
69쪽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오늘날 우리의 생을 굽어보시고 우리의 생애 동참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머리를 숙이고 귀를 기울여 거룩하신 역사 속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행위, 곧 지상에서 이룩된 그리스도의 역사에 동참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만 우리가 ‘거기에’가서 있는한,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 뒤집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임재가 비로소 나타나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도우심이 우리를 위해서 드러난 것입니다. 사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오늘 우리의 무엇을 하시려고 하는지를 찾는 것보다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또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무엇을 하셨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셨다는 것이 내가 죽는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셨다는 것이 마지막 날 나도 다시 일어나리라는 희망의 유일한 밑받침이 됩니다. 우리의 구원의 ‘우리 밖에’(extra nos) 있습니다. 나는 나의 구원을 나의 삶의 역사에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에서만 찾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사람, 그의 사람이 되심, 그의 십자가 그리고 그의 부활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요,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70쪽
이로써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성서를 읽는 일은 모두 다 우리에게 날마다 더욱 의미 있어지고 더욱 유익하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이라고 하고, 우리의 괴로움, 우리의 죄라고 하는 것이 정말 그대로 현실인 것이 아니라, 성서에야말로 우리의 삶, 우리의 괴로움, 우리의 죄 그리고 우리의 구원이 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손을 뻗으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서 밖에 구원을 받을 데가 없습니다. 성서 밖에서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배울 데가 없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성서읽기의 유익/중요성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이나 우리의 선조들처럼 성서를 다시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이를 위해서 시간과 정력을 아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선 우리들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성서를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그러나 이와 함께 이 요청을 긴박하게 만드는 데는 다른 중요한 이유들도 충분히 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튼튼히 성서의 기반 위에 서지 않고서 우리가 개인으로서 하는 일이나 교회로서 하는 일이 어떻게 확실하게 되며 확신을 가지게 될 수 있겠느냐 말입니다. 우리가 갈 길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성서의 가르침이 필요하다는 것을 정말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우리는 아주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마당에 성서의 가르침은 염두에도 두지 않고 ‘생활에서’,‘경험에서’얻은 것을 내세우고 입씨름하는 것을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71쪽
그러나 성서의 가르침은 이와는 아주 반대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성서의 가르침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고 주장하려는 사람들이야말로 성서를 진지하게 읽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고 연구하지도 않는 사람들이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습니다. 성서를 배워 보겠다고 혼자 애쓰지 않는 사람을 복음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뿐입니까? 그리스도인 형제가 곤경에 빠져 있을 때나 의심이 나서 고민하고 있을 때,하나님 자신의 말씀이 없이 우리가 그를 어떻게 도울 수 있는가 하는 문제도 제기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말은 모두 당장 힘을 잃을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집 주인이 창고에서 옛 것과 새 것을 꺼내는 듯하는”(마13:32)사람-풍부한 하나님의 말씀에서, 성서의 가르침과 경고와 위로의 말씀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를 쫓아낼 수 있고 행제를 도와 줄 수 있습니다. 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대는 아이 때부터 성서를 알았으니, 그 말씀이 그대를 구원에 이르도록 가르쳐 줄 수가 있으리라”(딤후3:15,루터 번역)
어떻게 성서를 읽을 것인가?
그러면 우리는 성서를 어떻게 읽어야 하겠습니까? 가정 예배 때에는 식구들이 차례로 계속해서 읽어 내려가는 것이 제일 좋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노라면 성서를 남의 앞에서 읽어 준다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이 드러 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에 대한 마음이 태도가 꾸밈 없이 솔직하고 겸허하게 나타나면, 그만큼 읽는 것이 내용에 더 잘 어울릴 것입니다.
72쪽
오래 믿은 그리스도인과 구도자와의 차이는 흔히 성서를 읽을 때에 뚜렷이 나타납니다. 성서를 바로 읽는 법으로서 생각해야 할 점은 사람 앞에서 읽을 때 절대로 자기가 성서 안에서 말씀하시는 그분인 것처럼 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서 안에서 분노를 발하시는 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며, 위로 하시는 이도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시며, 경종을 울리시는 이도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분노를 발하시고 위로하시고 경종을 울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음을 드리지 않고 건성으로 읽어도 좋다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말씀이 자기 자신에게 들려오는 것인 줄 알고 아주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읽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서를 바로 읽고 잘못 읽는 것의 차이는, 나를 하나님과 혼동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느냐 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자칫하면, 웅변조가 되고 감정적이 되고 기본적이 되거나 명령조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듣는 이들의 주목을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로 모으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성서를 읽을 때에 저지르는 죄인 것입니다.
만일 이것을 일상 겪는 일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면 이런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성서를 읽는 이의 입장은 친구에게서 온 편지를 남에게 읽어 주는 것과 아주 흡사한 것입니다. 나는 그 편지를 내가 쓴 것처럼 읽지는 않을 것입니다. 읽어가는 동안에 우리 사이에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 뚜렷이 드러날 것입니다.
73쪽
그렇지만 나는 내 친구의 편지를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듯이 남에게 읽어 줄수는 없는 것입니다. 나는 스스로가 거기 얽혀 있고 관계되어 있는 것을 느끼면서 읽을 것입니다. 성서는 배워 익힘으로써 바로 익힐 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마음가짐에 따라 바로 읽을 수도 있고 잘못 읽을 수 있습니다.
경험을 많이 쌓은 그리스도인들이 떠듬거리면서 성서를 읽는 것이 목사가 형식을 갖추어 읽는 것보다 훨씬 좋습니다. 가정예배 때 이 점에 서로 의견을 나누고 돕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렇게 성서를 계속해서 읽는다고 해서 성구가 생의 표어로 사용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경건회의 시작이나 또 다른 경우에 성구를 한 주간의 표어나 하루의 표어로 사용하는 것도 또한 그것으로 좋은 점이 있습니다.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