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의 역사:
당신은 사도들의 가르침과 친교를 계속하겠습니까?
(세례예식문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들로 교회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최초의 교회는 지중해를 중심으로 중동지방과 터키 그리고 그리스, 이탈리아 지방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선교의 과정 속에서 많은 이들이 순교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312년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에 로마의 주교가 점차 모든 교회에 대해 수위권을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후 로마제국의 수도가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지고 결국 제국이 동서로 갈라졌습니다. 이 때 콘스탄티노플주교와 로마 주교 사이에는 교회의 수위권 문제와,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교리적 논쟁으로 11세기에 이르러 교회는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로 분열하게 되었습니다. 서방교회는 로마 주교를 중심으로 지금의 로마 가톨릭교회가 되었고, 동방교회는 북아프리카와 중동, 그리스, 동유럽, 러시아 지역에서 정교회 또는 동방정교회가 되었습니다. 이런 교회분열은 16세기에 서방교회 안에서 종교개혁운동으로 또 다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은 약 일 천년에 걸친 중세교회의 모순을 타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분열을 거듭하게 되는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북유럽을 중심으로 루터교회가, 스위스와 스코틀랜드를 중심으로 개혁교회, 즉 장로교회가, 영국에서는 국교로서의 영국 교회(성공회)가 종교개혁과정을 거치면서 형성되었습니다.
영국성공회는 역사적으로 16세기에 로마가톨릭교회로부터 독립하였습니다. 하지만 기록에 의하면 이미 1세기가 끝나기 이전에 영국에 그리스도교인들이 있었습니다. 314년 프랑스 아를(Arles)공의회에는 영국의 주교가 참여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영국교회는 영국지방에서 독립적으로 형성되어 영국의 문화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후 7세기경에 로마가톨릭교회가 영국에 선교를 시작하면서 영국에 있었던 고대 켈틱(Celtic)교회는 로마가톨릭교회에 합병하게 되었습니다.
흔히들 영국교회가 로마가톨릭교회에서 독립한 것은 당시의 국왕 헨리 8세가 왕비 캐더린과 이혼하고 앤볼린과 결혼하기 위해서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국종교개혁의 정치적인 이유일 뿐입니다. 사실 헨리 8세의 결혼은 성서 상(레위기20:21), 당시 교회법 상으로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카타리나는 헨리의 죽은 형 아서의 처, 즉 형수였습니다. 그러나 교황청은 결혼관계를 통하여 영국에 지배권을 행사하려고 하였습니다. 헨리는 이 결혼무효를 요청하였으나 교황은 거부하였습니다. 결국, 당시의 정치적인 이유와 로마가톨릭교회의 부패에 대한 반감으로 1529년부터 1534년 사이에 영국의회는 법령을 통과하여 로마교황청과 단절을 선언하고 국교로서 성공회를 출범케 하였습니다.
그후 성공회는 메리여왕 때 로마로의 복귀와 엘리자벳 여왕 때의 재 분리의 경험을 겪으면서 초대교회의 전통을 지키면서 개신교 종교개혁의 길을 따라 교회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종교개혁 시에 성공회 신앙의 주춧돌은 “공동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와 “39개 조항”(The Thirty-Nine Article of Religion)였습니다. “공동기도서”와 “39개 조항”를 통하여 영국 성공회는 개혁된 카톨릭교회(the Reformed Catholic Church), 양극단을 배제하면서, 양자를 포용하는 신앙( comprehensive faith)을 갖게 되었습니다. 쉽게 말하여 신앙의 내용은 종교개혁의 개신교의 내용을 가지면서, 오래된 교회의 전통, 초대교회부터 내려오는 교회의 전통을 간직한 교회가 되어, 로마 카톨릭교회와 개신교의 중간에 위치하는 교회가 되엇습니다.
그후 영국성공회는 영국인이 세계로 진출함에 따라 17세기 말 부터 세계각지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미국, 카나다, 인도, 아프리카, 호주, 뉴질랜드 그리고 세계 여러 곳에 성공회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19, 20세기에는 영어권에서 성공회가 성장하였지만 20세기 후반부터는 비 영어권, 특히 아프리카에서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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