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4일 The meek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마태오 5:5)

자기주장의 시대에, 온유함은 시대에 역행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정확한 이해가 도움이 되겠지요. 온유함은 늘어진 게으름이 아닙니다. 도리어 잘 훈련된 의지 입니다. 씨끌벅적한 분쟁의 자리에서, 잘 조절된 순종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는 온유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나의 주여, 저의 다혈질 적인 성격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그것들을 당신의 다스림 아래에 놓겠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당신이 원하는 곳에 사용되기를 원합니다. 당신을 제가 원하는대로 이용하지 않을것입니다. 다만 저를 당신에게 드릴 뿐입니다. 아멘

———

공동번역서는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시편 37편 11절을 인용하신 것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 구절을 살펴보면,

“악한 자는 망하게 마련이요. 야훼를 기다리는 자 땅을 물려받으리라
조금만 기다려라, 악인은 망할 것이다. 아무리 그 있던 자리를 찾아도 그는 의미 없으리라.
보잘것 없는 사람은 땅을 차지하고, 태평세월을 누리리라” (시편 37:9-11)

물론 여기서 이야기하는 땅은, 약속의 땅 입니다.
이 설교를 하셨던 시기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이스라엘의 땅은 로마의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유대인들이 이 땅을 로마에게서 되찾아 올것을 희망하고 있었지요. 그래서 반란도 일으켜 보고, 여러가지 정치적인 노력을 쏟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주께서는 힘이 센 사람도 아니고, 뼈대가 있는 집안의 자손도 아닌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할 것이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을 처음 접했던 사람들에게 이 “약속의 땅”은 더이상 이스라엘에 국한된 땅이 아님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복음을 전해 들은 사람들의 세력이 퍼져 나가고 있을 때였으니까요.
따라서 이 세번째 복에서의 땅은 여러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더욱 중요한것은
그렇다면 누가 “온유한 사람” 이냐? 라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시편 37편에서 나오지요. 바로 세상이 보기에는 보잘것 없게 여겨지는 사람이지만, 야훼 하느님을 기다리는 자. 하느님의 인도를 따르는 자 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재미있는것은,
일반적으로 이야기 할 때, 이 마태복음은 헬라어, 즉 그리스어로 써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온유한 사람’ 에 대한 그리스어 표현은 Prays 로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를 이야기 할 때 사용되는 단어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이 설교를 하셨을 때는 아람어로 하셨을 것이고, 그 뜻은 시편에서의 의미와 같겠지만, 이 복음서를 읽는 사람들이 느끼는 ‘온유한 사람’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화평을 이루고 불의에 화를 낼수 있는 그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마태는 이 두가지를 동시에 노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진정한 온유한 사람은, 하느님을 기다리고, 하느님의 인도를 따르는 자인데, 그렇기 때문에 불의에 대해서 올바르게 저항할수 있는 사람이며 그 사람은 하느님의 약속의 땅을 받는것 이라고 이야기 하고 싶었을지도요.

유진 피터슨 목사님도 그 두가지를 함께 이야기 하고 싶으셨던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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