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8일 Toward a nonjudgemental life

 

One of the hardest spiritual tasks is to live without prejudices. Sometimes we aren’t even aware how deeply rooted our prejudices are. We may think that we relate to people who are different from us in colour, religion, sexual orientation, or lifestyle as equals, but in concrete circumstances our spontaneous thoughts, uncensored words, and knee-jerk reactions often reveal that our prejudices are still there.

Strangers, people different than we are, stir up fear, discomfort, suspicion, and hostility. They make us lose our sense of security just by being “other.” Only when we fully claim that God loves us in an unconditional way and look at “those other persons” as equally loved can we begin to discover that the great variety in being human is an expression of the immense richness of God’s heart. Then the need to prejudge people can gradually disappear.

영적인 삶을 살기에 가장 힘든 과제는 편견을 갖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어쩔때는 우리가 얼마나 깊은 편견에 빠져 있는지 알지도 못합니다. 다른 피부색, 다른 종교, 다른 성지향 또는 생활패턴등이 다른 사람들을 동등하게 대하며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상황에서 우리의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생각들, 불쑥 내 뱉은 단어 그리고 반사적인 행동들은 종종 우리의 편견들이 여전히 존재함을 보여줍니다.
모르는 사람들, 우리와 다른 사람들은, 두려움, 불편함, 의심 그리고 적대감등을 일으키지요. 그들은 그저 우리와 ‘다르다’ 라는 것 만으로 우리의 불안감을 키웁니다. 오직 하느님께서 우리를 조건없이 사랑하시고 그 ‘우리와 다른 사람들’ 도 역시 똑같이 사랑받은 자들이라는것을 생각할 때, 비로소 우리는 인류의 이 엄청난 다양성이 하느님의 생각과 마음의 그 엄청난 풍성하심에 대한 증표인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나면 다른사람에 대해 편견을 갖을 필요가 점차 사라지게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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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동산의 유령집이 무서운 이유는 그곳에서 발견할수 있는 으시시한 인형들이나 귀신으로 분장을 한 사람들 때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표를 사는 순간 이미 우리는 그것들이 진짜가 아님을 알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사람들이 그 유령의 집에서 소리를 지르며 무서워 하는 이유는, 어디에서 무엇이 어떻게 등장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심장이 약한 사람이라도, 같은 유령의 집을 한 몇번 들어갔다가 나와서,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알게 된다면 더 이상 그 유령의 집을 무서워 하지 않을것입니다.

알지 못하는것은 무섭습니다. (물론 알아도 무서운것도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정신적인 또는 육체적인 고통을 주는것을 안다면 그 공포는 더 커질수도 있지요. 유령의집을 몇번 가보고 나서 두려움이 없어지는 이유는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아는것도 있지만, 그 모형들이 또는 배우들이 본인을 해하지 않을것을 알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편견들은 모르는 것에 대한 공포에서 나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내가 익숙하지 못한것에 대한 공포 때문에, 미리미리 마음을 준비하기 위한 방어기제 일지도 모른다는 얘기지요.
또 어쩌면, 과거의 비슷한 경험으로 인해, 곰곰히 생각해 보면 완전히 다른 상황, 다른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그 과거의 기억과 같은 일이 일어날것이라 생각하고 그것에 대비하는 방어기제 일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긍정적인 편견들은 괜찮은것 일까요?
“키가 큰 사람들은 운동을 잘 할것이다” 분명히 긍정적인 편견입니다. 그런데 키가 큰 사람들 중에서 운동을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엄청난 부담감이 되고, 도리어 운동을 즐기는데 결코 도움이 되지 못하고, 운동을 회피하게끔 하는 작용을 할 수도 있습니다. (실례가 필요하시다면 그렇게 멀리 가지 않으셔도 됩니다. ㅠㅠ)
물론, 이러한 긍정적인 편견(Benevolent prejudice)은 직접적으로는 두려움에 대한 방어기제는 아닙니다만, 결국은 그러한 긍정적인 기대감으로 이득을 보고 그것을 통해서 실패를 줄여보고자 하는 생각이 밑에 깔려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몇단계를 거쳤을 뿐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두려움은 징벌을 생각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품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요한 1서 4:16)

나웬 신부님의 묵상에서도, 주인돈 신부님의 설교에서도 자주 언급되지만,
두려움의 반대는 용기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사랑은 다른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끼며 보살피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을 사랑하는 자가 다른이도 사랑할수 있기에, 자기자신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끼며 보살핍니다. (따라서 사랑은 일방적 희생도 아닙니다)

모른다고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르면 배우면 됩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오랫동안 모르는것을 ‘죄’ 인것 처럼 살아왔고, 또 그래서 두려움에 빠져 있는것 인지도 모릅니다.

“제가 ( 백인의 문화에 대해, 흑인의 문화에 대해, 이슬람교에 대해, 불교에 대해, 동성애에 대해, 젊은사람들의 생각에 대해, 어르신의 생각에 대해, 여성분에 대해, 남성분들에대해, 장애를 지니고 있는 것에 대해, 군인의 삶에 대해, 선생님의 삶에 대해, 세탁소를 경영하는것에 대해… ) 잘 모릅니다. 가르쳐 주실수 있겠습니까?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결국,
사랑입니다.

One Comment

  1. For further reflection…

    For in the same way you judge others, you will be judged, and with the measure you use, it will be measured to you. Why do you look at the speck of sawdust in [another’s] eye and pay no attention to the plank in your own eye? How can you say to [another], “Let me take the speck out of your eye,” when all the while there is a plank in your own? – Matthew 7: 2-4 (NIV)
    남을 판단하는 대로 너희도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남을 저울질하는 대로 너희도 저울질을 당할 것이다.
    어찌하여 너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제 눈 속에 들어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제 눈 속에 있는 들보도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네 눈의 티를 빼내어 주겠다. ‘ 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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