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인 묵상 (Page 3)

봄 일기

봄이 일어서니 내 마음도 기쁘게 일어서야지 나도 어서 희망이 되어야지 누군가에게 다가가 봄이 되려면 내가 먼저 봄이 되어야지 그렇구나 그렇구나 마음에 흐르는 시냇물 소리

사랑

문닫어도 소용 없네 그의 포로된 후 편히 쉴 날 하루도 없네 아무도 밟지 않은 내가슴 겨울 눈밭 동백꽃 피흘리는 아픔이었네 그가 처음으로 내게 왔을때 나는 이미 그의 것이었네 부르면 빛이 되는 절대의 그 문닫아도 들어오네 탱자꽃 하얗게 가시속에 뿜어낸 눈물이었네

쌀 노래

나는 듣고 있네 내 안에 들어와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뼈가 되는 한 톨의 쌀의 노래 그가 춤추는 소리를 쌀의 고운 웃음 가득히 흔들리는 우리의 겸허한 들판은 꿈에서도 잊을 수 없네 하얀 쌀을 씻어 밥을 안치는 엄마의 마음으로 날마다 새롭게 희망을 안쳐야지 적은 양의 쌀이 불어 많은 양의 밥이 되듯 적은 분량의 사랑으로도 나눌수록 넘쳐나는…

기도할 때 내 마음은

기도할 때 내 마음은 바다로 갑니다 파도에 씻긴 흰 모래밭의 조개껍질처럼 닳고 닳았어도 늘 새롭기만 한 감사와 찬미의 말을 한꺼번에 쏟아 놓으면 저 수평선 끝에서 빙그레 웃으시는 나의 하느님 기도할 때 내 마음은 하늘이 됩니다 슬픔과 뉘우침의 말들은 비가 되고 기쁨과 사랑의 말들은 흰 눈으로 쌓입니다 때로는 번개와 우박으로 잠깐 지나가는 두려움 때로는 구름이나 노을로…

흐르는 삶만이

구름도 흐르고 강물도 흐르고 바람도 흐르고 오늘도 흐르는 것만이 나를 살게 하네 다른사람이 던지는 칭찬의 말도 이러저런 비난의 말도 이것이 낳은 기쁨과 슬픔도 어서어서 흘러가라 흐르는 세월 흐르는 마음 흐르는 사람들 진정 흐르는 삶만이 나를 길들이네

희망은 깨어 있네

나는 늘 작아서 힘이 없는데 믿음이 부족해서 두려운데 그래도 괜찮다고 당신은 내게 말하는군요 살아 있는 것 자체가 희망이고 옆에 있는 사람들이 다 희망이라고 내게 다시 말해주는 나의 작은 희망인 당신 고맙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숨을 쉽니다 힘든 일 있어도 노래를 부릅니다 자면서도 깨어 있습니다.

새해 첫날의 소망

가만히 귀 기울이면 첫눈 내리는 소리가 금방이라도 들려올 것 같은 하얀 새 달력 위에, 그리고 내 마음 위에 바다 내음 풍겨오는 푸른 잉크를 찍어 희망이라고 씁니다. 창문을 열고 오래 정들었던 겨울 나무를 향해 한결같은 참을성과 고요함을 지닐 것 이라고 푸른 목소리로 다짐합니다. 세월은 부지런히 앞으로 가는데 나는 게으르게 뒤처지는 어리석음을 후회하고 후회하며 올려다본 하늘에는 둥근…

시간의 선물

내가 살아 있기에 새롭게 만나는 시간의 얼굴 오늘도 나와 함께 일어나 초록빛 새옷을 입고 활짝 웃고 있네요 하루를 시작하며 세수하는 나의 얼굴 위에도 아침 인사를 나누는 식구들의 목소리에도 길을 나서는 나의 신발위에도 시간은 가만히 앉아 어서 사랑하라고 나를 채촉하네요 살아서 나를 따라오는 시간들이 이렇게 가슴 뛰는 선물임을 몰랐네요

작은 소망

내가 죽기 전 한 톨의 소금 같은 詩를 써서 누군가의 마음을 하얗게 만들 수 있을까 한 톨의 詩가 세상을 다 구원하진 못해도 사나운 눈길을 순하게 만드는 작은 기도는 될 수 있겠지 힘들 때 잠시 웃음을 찾는 작은 위로는 될 수 있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하여 맛있는 소금 한 톨 찾는 중이네

말을 위한 기도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수없이 뿌려놓은 말들이 어디서 어떻게 열매를 맺었을까 조용히 헤아려 볼때가 있습니다. 무심코 뿌린 말의 씨라도 그 어디선가 뿌리를 내렸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왠지 두렵습니다. 더러는 허공으로 사라지고 더러는 다른 이의 가슴속에서 좋은열매를 또는 언짢은 열매를 맺기도 했을 언어의 나무 내가 지닌 언어의 나무에도 멀고 가까운 이웃들이 주고간 크고 작은 말의 열매들이 주렁주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