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y is what makes life worth living, but for many joy seems hard to find. They complain that their lives are sorrowful and depressing. What then brings the joy we so much desire? Are some people just lucky, while others have run out of luck? Strange as it may sound, we can choose joy. Two people can be part of the same event, but one may choose to live it quite differently than the other. One may choose to trust that what happened, painful as it may be, holds a promise. The other may choose despair and be destroyed by it.
What makes us human is precisely this freedom of choice.
기쁨은 삶을 살아볼만한 것으로 만들어 주는 요소지요.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그 기쁨은 찾기 힘든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삶이 온통 슬픔과 절망으로 가득차 있다고 불평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렇게 원하는 그 기쁨은 어떻게 발견할수 있을까요? 그저 어떤 사람들은 행운이 있어 그 기쁨을 갖고있고, 어떤 사람들은 그 행운이 없는것일까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기쁨을 ‘선택’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그상황을 똑같이 경험한 두사람이 있다면, 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갈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그 일어난 일이, 설령 고통스러운것 일지라도, 그 안에서 약속이 숨겨져 있다고 믿는것을 선택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절망을 선택해서 그것에 의해 파멸의 길을 걷는것을 선택할수 있습니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것은 바로 이 선택의 자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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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잡히시던 날 밤.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십니다.
베드로가 화들짝 놀랍니다.
“ 안됩니다. 제 발만은 결코 씻지 못합니다 “
그러자 주께서는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이제 나와 아무 상관도 없게 된다” 하십니다. (요한 13:8)
이 장면은, 다들 알고 계시다시피, 주님께서 ‘겸손’을 실천하시며 보여주시고 우리들도 그렇게 할것을 바라시는 장면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발을 씻기는일은 오직 하인들만 했던 일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 장면에서 말씀하시는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베드로의 반응에서 배울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스승이신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이고 메시아이신 주님이 종들이 하는 일을 이해할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께서는 이렇게 말씀 하고 계십니다.
“네가 내가 기적을 행하고, 가르침을 주고, 하느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나와 관계를 맺는것이냐. 너보다 나은 사람이기에 친구사이를 유지 하는것이냐. 너는 너보다 낮은 사람들, 부족한 사람들, 종이나 하인같은 사람과도 친구가 되어야 한다. “
다른 복음서와는 다르게 요한복음에서만 성만찬의 이야기가 없습니다. 대신 이 발을 씻기는 장면은 오직 요한복음서에만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미 몇십년이 지나고 교회의 모습이 어느정도 갖추어진 시대에 씌여진 요한복음은, 이미 행하고 있는 성만찬의 이야기를 또다시 하는것 보다, 여전히 교회가운데 남아 있었을, 윗사람 아랫사람, 부한 사람 가난한 사람 같은 차별의 모습을 걱정해서 언급한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살아가면서,
좋은일만 있을수도 없고, 나쁜일만 있을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좋은일, 나쁜일의 정도는 분명히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 주께서 발을 씻기시는 장면에서,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요한이라 여겨지는)가 선택한 행동과,
베드로가 선택한 행동과,
그리고 유다가 선택한 행동은 각각 다릅니다.
요한이 한것 처럼, 언제나 주님의 곁에 앉아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베드로처럼, 주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몰라서 엉뚱한 이야기(13:9)를 하거나, 뻘쭘해서 눈치보며(13:24) 결국에는 허황된 장담(13:37)을 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께서 양을 맡기시는 반석이 됩니다.
발을 씻기시는 그 공간에, 그 자리에, 그 대상에 유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유다가 어떠한 선택을 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가 생각했던 메시아의 모습도 아니었고, 도리어 종의 모습을 보이시는 주님.
그리고 ‘선택’을 합니다. 스스로가 낮은자가 될수도 없었고, 낮은자와는 친구도 될수 없었던 그는, 주님을 팔아버리는 선택을 합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적어도 겉으로는 낮은자들을, 가난한 자들을 가장 걱정하던 사람은 유다였습니다. (요한 12:4-5) 그러나 사실은,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을 더 아끼시는 것이나, 특히 이 장면에서 마리아에게 향하신 사랑에 대한 질투가 가득했던것 같습니다.
그 질투의 마음, 주님을 잘못 받아들인 마음, 그리고 그로인해 엄청난 선택을 하게 되는 마음. 주님도 어떻게 하실수 없는 자유의지 입니다.
선택은 자유입니다.
3년을 따라 다녔어도 여전히 못알아 듣는 베드로 같은 선택을 하셔도 됩니다.
괜찮습니다.
다만,
유다와 같은 선택은 하지 마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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