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9일 A ministry that never ends

Reconciliation is much more than a one-time event by which a conflict is resolved and peace established. A ministry of reconciliation goes far beyond problem solving, mediation, and peace agreements. There is not a moment in our lives without the need for reconciliation. When we dare to look at the myriad hostile feelings and thoughts in our hearts and minds, we will immediately recognize the many little and big wars in which we take part. Our enemy can be a parent, a child, a “friendly” neighbor, people with different lifestyles, people who do not think as we think, speak as we speak, or act as we act. They all can become “them.” Right there is where reconciliation is needed.

Reconciliation touches the most hidden parts of our souls. God gave reconciliation to us as a ministry that never ends.

화해란, 갈등이 해결되고 평화가 이루어지는 그런 일회성에 그치는 행사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화해의 사역은 문제를 해결하고, 중재를 하고, 평화 협정을 맺는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가운데 화해가 필요하지 않은 순간은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과 정신속에서 수 많은 적대적인 감정과 생각들을 직시한다면, 우리가 하고 있는 크고 작은 전쟁들을 바로 떠올릴수 있을것입니다. 우리의 적은 부모님 일수도 있고, 자녀일수도 있고, 친절한척하는 이웃일수도 있고, 우리와 다른 삶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사람들 일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대로 생각하지 않고, 우리가 말하는대로 말하지 않고, 우리가 행동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은 사람들 일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모두 “그들” 이 되어버리는 거죠. 바로 그 순간, 그 자리가 화해가 필요한 자리입니다.

화해는 우리의 가장 감추어진 부분을 어루만집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 화해의 사역을 영원히 하실것을 원하십니다.

—————

주님께서는 공생애 생활을 하시면서 그가 진짜 누구인지, 하느님의 아들인것 그리고 메시아 이신것을 대놓고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귀신들이 그것을 이야기 할 때는 조용히 하라 하셨고, 어쩌다가 제자들이 언급해도 살짝 인정만 하시고 많은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다니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딱 한번, 주께서 본인 입으로 스스로 메시아 이신것을 인정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로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를 하실때 이지요.

“ 그 여자가 ‘저는 그리스도라 하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오시면 저희에게 모든 것을 다 알려주시겠지요’ 하자 예수께서는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 (요한복음 4:25-26)

영어 성경을 보면, 26절에 주께서는 “ I am he the one who is speaking to you “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he’ 에 Greek 성서의 ‘I am’ 에서 따온 말이다라고 주석이 되어 있습니다.

구약을 잘 아시는 분은 눈치 채셨겠지만, 이것이 거룩한 하느님의 이름입니다.

모세가 하느님의 이름을 묻자 하느님께서는 “나는 곧 나다 (I am who I am)” (출애굽기 3:14) 라고 대답하신 장면에서 나오지요.

다시말해서, 예수님께서는 메시아가 오신다는 이야기에 그 메시아가 본인이라고 직접 말하시는것에 “더해서” 예수님 본인이 곧 하느님이시기도 하다는 이야기까지 하신것입니다.

그런데, 그 대상은, 유대인도 아니고 남자도 아닌 여자에, 그것도 모자라서 과거가 아주 복잡한 사마리아 여인 이었다는 점은 눈여겨 봐야 할 장면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물을 달라고 하는 이야기에서 시작한 대화가 메시아에 대한 이야기로 바뀌게 된 계기를 살펴보면, 여인에게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하신 예수님께 그 여인이 남편이 없다 대답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여인의 가장 감추어진 부분을 어루만져 주십니다. (요한복음 4:16-19)

화해가 이루어지는 장면입니다.

우리와 같이 생각하지 않고, 말하지도 않고, 행동하지도 않는 사람들이지만, 마음속 깊은곳 감추어진 상처가 어루만져 주는 순간 화해는 일어나고, 그것은 놀라운 일로 이어집니다.

직업병일수도 있고, 제가 평생을 갖고 있는 성품일수도 있겠지만, 항상 너무 자세한것을 세세하게 설명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상대방이 그 자세한것을 알 필요가 없는데도, 그리고 또 관심을 갖고 있지 않는데도 장황하게 설명을 하곤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설명을 했음에도 예상과는 다른 반응이 나올 경우 스스로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것은 상대방이 저에게 상처를 준것이 아니라, 제가 스스로 상처를 만든것입니다. 자세한 설명을 해달라고 할 때는 설명을 해주면 되지만, 그렇지 않을경우에 미리 하나에서 열까지 설명을 하려고 든다면 듣는사람이 자칫 피곤해 질수도 있으니까요.

아마도 완벽해야 사랑을 받을수 있다는 강박관념에서 발전된 행동양식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지금 저는, 역시나 여러가지를 길게 설명을 해 놓고, 그러는 와중에 저의 깊은 상처를 드러내며, 화해의 사역을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0 Comments

Add a Comment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d bloggers like th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