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7일 Dressed in gentleness

 

Once in a while we meet a gentle person. Gentleness is a virtue hard to find in a society that admires toughness and roughness. We are encouraged to get things done and to get them done fast, even when people get hurt in the process. Success, accomplishment, and productivity count. But the cost is high. There is no place for gentleness in such a milieu.

Gentle is the one who does “not break the crushed reed, or snuff the faltering wick” (Matthew 12:20). Gentle is the one who is attentive to the strengths and weaknesses of the other and enjoys being together more than accomplishing something. A gentle person treads lightly, listens carefully, looks tenderly, and touches with reverence. A gentle person knows that true growth requires nurture, not force. Let’s dress ourselves with gentleness. In our tough and often unbending world our gentleness can be a vivid reminder of the presence of God among us.

가끔가다가 아주 상냥하고 부드러운 사람을 만납니다. 강하고 거친것을 선망하는 사회에서 부드러움을 만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든지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특히 그 일들이 빨리 이루어지기를 요구받습니다. 그 과정중에서 사람들이 다치는 일이 있더라도 말이지요. 성공, 성취 그리고 성과.. 이 모든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희생은 크지요. 그와 같은 환경에서는 부드러움이란 설 자리가 없습니다.
부드러운 사람은 “상한 갈대도 꺽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는” 사람입니다. (마태오 12:20) 부드러운 사람은 다른 사람의 강점과 단점 모두에 관심을 두고, 무엇인가를 이루는데 보다는 함께 있는것 그 자체를 즐기는 사람입니다. 부드러운 사람은 살포시 지르밟기를 하고, 주의깊게 들으며, 다정하게 바라보며 공손히 어루만집니다. 부드러운 사람은 진정한 성장은 힘이 아니라 보살핌이 필요하다는것을 압니다. 우리 이 부드러움으로 옷 입읍시다. 이 험하고 종종 굽힐줄 모르는 세상에서, 우리의 부드러움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다는것을 확실하게 상기시켜줄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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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들이 (신부님들도 인용하시는지는 경험이 없어 모르겠습니다) 가끔 설교시간에 졸면 안된다 하시며 인용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사도행전 20장 7절에서 12절까지의 이야기 입니다.
트로아스를 방문한 바울는 그곳을 떠나기 전날 밤에 사람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 와중에 유디코 라는 청년이 바울로의 이야기를 창문에 걸터 앉아 듣다가 졸음에 빠집니다. 그리고 창문에서 떨어져 죽음을 당하지요. 물론 바울이 그 청년을 다시 살려 놓기는 합니다.

이 이야기를 많은 분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때 정신 바짝 차리고 깨어있어야 한다.. 세상과 교회의 사이를 뜻하는 창가, 즉 세상과 교회에 양다리 걸치고 있으면 안된다.. 이런식의 설교를 하십니다.

그런데, 과연 이 이야기가 그런 이야기 일까요?
바울이 전도여행을 다닙니다. 비행기도 없었고, 배타고 걸어서 다닙니다. 한번 방문을 하면 그 도시에 또는 동네에 다시 또 방문할것이라는 보장.. 절대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바울이 다음날 떠난답니다. (7절) 따라서 한마디라도 더 바울의 이야기를 듣고 질문응답등을 하고 싶어서 그 마지막 모임은 밤이 깊어가도록 계속 되었습니다. (7절) 그리고 밤이 깊었기 때문에, 그들이 모인 윗층 방에는 등불이 많이 켜져 있었습니다. (8절) 그리고 우리의 유디코 라는 청년이 등장합니다.
유디코라는 이름은 그때 당시 주로 노예나 몸종의 이름이었다 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분명히 하루종일 일을 하고 그 자리에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주인을 따라 왔을지도 모르지요. 그가 처음부터 창가에 앉아 있었는지는 알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름으로 미루어 짐작컨데 그는 하루종일 일을 하고 와서 몸이 많이 피곤해 있었을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등불을 켜 놓아서, 그렇지 않아도 습한 바닷가의 기후와 합쳐저 방안은 후덥지근 했었을 것입니다.
졸음이 왔을것입니다. 그런데 졸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울 선생님은 내일 떠나시기 때문입니다. 다시는 못볼지 모릅니다. 눈을 부릅떠 보기도 하고, 허벅지를 꼬집어 보기도 하지만, 하루종일 일한 지친 몸은 눈꺼풀을 누르기만 합니다.
그래서 그는 창가로 자리를 옮겼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밤공기도 그의 피곤한 몸을 깨우지 못하고 그는 잠이 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균형을 잃고 창문에서 떨어집니다.

정말로 이 장면이, 설교시간에 졸면 안된다.. 를 강조하기 위한 장면이었다면, 바울이 청년을 살려낸후 빵을 떼어 먹으며 이야기를 하는 장면(11절)이 없어야 합니다. 바울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이야기를 계속 했던것 같습니다. 스트레칭을 했을지도 모르지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집으로 데리고 가며 한없는 위로를 받았다 했습니다. (12절) 그 누구도 청년을 혼냈다 하지 않습니다. ‘이 녀석아 넌 운이 좋은거야’ ‘ 어떻게 바울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졸수가 있어?’ 이러지 않았습니다.

성서에서 바리새인들이 나오는 장면마다, 살벌함을 느낍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한 위의 장면에서도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안식일에 밀이삭을 잘라 먹는것..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는것.. 이런것들을 갖고 그들은 문제삼습니다.

언젠가, 뉴욕타임즈에서 아주 전통적인 유대인들이 모여 사는 뉴욕시 브루클린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기사를 읽은적이 있습니다. 장애를 입어서 휠체어에서 생활하는 분이 계셨는데 그는 안식일에 회당에 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휠체어를 미는것도.. 전동휠체어를 이용해서 본인이 그것을 운전하는것도 ‘일’에 해당하기 때문에, ‘일’을 해서는 안되는 안식일에 회당에 갈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주객이 전도되었습니다. 율법이 왜 있는지, 그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그 의미가 사라져 버린 형국입니다.
그런데, 가끔, 우리 기독교인들도 그렇게 행동하고 말하는것을 봅니다.

너무나도 말씀에 대한 열정이 커서, 온몸이 피곤하고 지쳐 금방이라도 쓰러질것 같은 몸을 이끌고 바울의 마지막 밤 모임에 참석하던 중에, 그 열정 때문에 목숨을 잃었던 청년의 이야기가, 설교시간에 졸면 세상적인 악마의 유혹에 빠진것이라고 매몰찬 이야기로 바뀝니다.
안식일에 가족과 함께 회당에 가고 싶은데, 일을 해서는 안된다는 법을 지키기 위해, 빛하나 새어 나가지 못하게 창문들을 커튼으로 꽁꽁 닫힌 그 집에서 몇시간을 혼자 있어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승자만이 인정받는 사회입니다.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면, 부자가 아니면 교회에서도 인정 받지 못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봅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상한 갈대도 어루만지십니다.
유디코를 살리십니다.
우리를 살리십니다.
그 부드러운 손길로 우리를 살리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루가 10:37)

* 오늘 짜투리 글의 주제는 신부님께서 설교하실때 졸아도 된다는 이야기가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
* 사도행전 20장 이야기에 대한 해석은 오랜전에 들었던 LA 한길교회의 노진준 목사님 설교내용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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