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3일 God’s faithfulness and ours

 

When God makes a covenant with us, God says: “I will love you with an everlasting love. I will be faithful to you, even when you run away from me, reject me, or betray me.” In our society we don’t speak much about covenants; we speak about contracts. When we make a contract with a person, we say: “I will fulfill my part as long as you fulfill yours. When you don’t live up to your promises, I no longer have to live up to mine.” Contracts are often broken because the partners are unwilling or unable to be faithful to their terms.

But God didn’t make a contract with us; God made a covenant with us, and God wants our relationships with one another to reflect that covenant. That’s why marriage, friendship, life in community are all ways to give visibility to God’s faithfulness in our lives together.

하느님께서 우리와 계약을 세우실 때, 하느님께서는 “ 나는 너를 영원히, 변치 않을 사랑으로 사랑하리라. 네가 비록 나에게서 도망치고, 나를 부인하고 또는 배반할 지라도 너를 향한 나의 사랑은 변치 않으리라” 라고 말씀 하십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는 ‘언약’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로 ‘계약’ 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요. 우리가 다른 사람과 ‘계약’을 맺을때,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 당신이 당신의 몫을 하기만 하면 나의 몫을 할것 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면 내가 한 약속도 지킬 의무가 없습니다” 계약들은 종종 당사자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거나 또는 지킬수 없게 될때 깨지게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계약’을 맺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우리 서로서로간의 관계들이 그 언약에 근거해서 이루어 질것을 바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 우정 그리고 공동체의 삶들이, 우리의 하나되는 삶 가운데 하느님의 신실하심을 볼수 있는 창문이 되는 이유입니다.

——————–

하느님의 변치 않는 언약. 그리고 우리가 그 언약을 파기하고 배반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중의 하나가 루가복음서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이야기’ 입니다.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라서, 이 이야기 하나만 가지고 오랫동안 설교가 가능할 정도인 이야기이고, 여기저기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한 이야기들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 방탕한 생활을 하고 돌아 왔는데, 아버지는 그를 받아주었다. 하느님의 변치 않는 사랑..

뭐 이정도의 이야기로 하느님의 언약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대충 가닥을 잡고 다시 이 이야기를 읽어 내려가던 중에 이전에는 눈에 들어 오지 않았던 부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것이 성서 읽기의 신비로움 입니다. 같은 이야기를 수도 없이 읽었지만, 이렇게 새로울 때가 제법 많이 있습니다)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많아…” (17절)
“아버지께 돌아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으니..” (18-19절)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습니다.”(21절)

아버지께 돌아갈 생각을 하던 때에도 그리고 직접 아버지를 대면할 때에도, 이 아들은 말로는 아들로의 자격이 없다고 하지만 사실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름으로써 ‘아들’ 임을 계속 상기하고 있습니다.
그는 언제나 아버지의 아들이었습니다. 설령 품꾼으로 써주십시오.. 라고 사정해 보겠다 생각은 했지만, 분명히 밑바닥에는 아버지를 믿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큰아들은 조금 다릅니다.
“저는 이렇게 여러해 동안 아버지를 위해서 종이나 다름없이 일을 하며.. Listen, For all these years I have been working like a slave for you” (29절)

그는 본인을 ‘종’으로 생각하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나마 한글 성서는 아버지라는 단어가 들어가지만, 영어 성경에서는 Father 라는 단어 조차 나오지 않습니다. (반면, 작은아들은 Father 라는 호칭을 계속 사용합니다)

어쩌면 우리의 더 큰 문제는,
탕자처럼 방황을 하고 하느님을 멀리하는것이 아니라,
이미 하느님의 언약으로 말미암아.. 이미 그의 구속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모두 주님의 사람이 된것임을 망각하고 사는 것, 즉 아들인데 아들로 살지 않고, 아버지와 가까이 살면서도 종처럼 산 큰아들의 모습 같은것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건져 주지 않았느나?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내 사람이다” (이사야 43:1)

우린 주님의 아들 딸 입니다. 주님의 사람입니다. Period.

———-

* 생각이 계속 진행된 김에 덤으로 하나 더…

그렇다면 자기의 본모습을 잃은 사람들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그것 역시 큰아들과 아버지의 대화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에게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 주지 않으시더니 “(29절)
“동생이 오니까 그 아이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까지 잡아 주시다니요!” (30절)

“이 기쁜 날을 어떻게 즐기지 않겠느냐? WE had to celebrate and rejoice”(32절)

이 돌아온 탕자 이야기의 앞에는 ‘잃어버린 양’ 과 ‘잃어버린 동전’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두 이야기 모두 찾은 사람이 기뻐서 잔치를 베풀지요.
이 탕자 이야기의 아버지도 마찬가지 입니다. 살진 송아지를 잡아 벌이는 잔치는 ‘아버지’ 가 기뻐서.. ‘큰 아들을 포함해서 온 집안 사람들’ 이 기뻐해서 베푸는 잔치입니다.
그런데, 큰아들은 ‘잔치’ 의 대상을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잔치를 벌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당연히 지금 벌어지고 있는 잔치도 동생을 위한 잔치라 생각하고 있는것 입니다.

하느님의 언약은..하느님의 구속은..
하느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깨닫고, 하느님께서 하셨던 언약을 기억하면, (물론 그 덕분에 감당치 못한 은혜를 받는 것은 우리이긴 하지만), 그 순간 가장 기뻐하실 분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자기의 본 모습을 잃은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서 생각하고 일 합니다.
그러나, 내가 누구인지 잊지 않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기쁨을 위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삽니다.

*이렇게 오늘 나웬신부님께서 어제 짜투리 글에서 했던 말씀을 하실줄 모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어제 다) 해버렸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조금 당황스럽네요. 그덕분에 짜투리글이 두서 없이 길어져 버렸습니다.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진점 양해를 구합니다.

0 Comments

Add a Comment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d bloggers like th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