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6일 Question from above

What are spiritual questions? They are questions from above. Most questions people ask of Jesus are questions from below, such as the question about which of a woman’s seven husbands she will be married to in the resurrection. Jesus does not answer this question because it comes from a legalistic mind-set. It is a question from below.

Often Jesus responds by changing this question. In the case of the woman with seven husbands he says, “At the resurrection men and women do not marry – have you never read what God himself said to you: ‘I am God of Abraham, the God of Isaac and the God of Jacob?’ He is God not of the dead but of the living” (Matthew 22:23-30).

We have to keep looking for the spiritual question if we want spiritual answers.

영적인 질문들이란 무엇일까요? 그 질문들은 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했던 질문들의 대부분은 밑에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남편이 7명이 있는 여인이 부활후 누구와 연을 이어갈것인가? 같은것이죠.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에 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질문들은 법률의 굴레 속에 있는 사고방식에서 나온 질문들이었기 때문이지요. 즉 밑에서 온 질문입니다.

종종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질문 자체를 바꾸는 방법으로 대응을 하십니다. 이 남편이 일곱이 있던 여인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는 “ 부활한 다음에는 장가가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다….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하신 말씀을 아직 읽어본 일이 없느냐? ‘나는 아브람함의 하느님이요. 이사악의 하느님이요,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시지 않았느냐?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이라는 뜻이다” (마태오 22:23-30)

만일 우리가 영적인 답을 원한다면 계속해서 영적인 질문을 해야 할 것입니다.

———-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2003년도 영화 ‘올드보이’

주인공 오대수씨는 어느날 길거리에서 납치되어서 싸구려 호텔방 같은곳에 감금이 됩니다. 그리고 아무런 이유를 알지 못한채 15년동안 그 곳에서 갇혀 지내지요. 그리고 어느날 역시 아무 이유없이 풀려납니다. 그리고 그는 누가 자신을 15년동안 가두어 두었는지를 찾아내서 복수를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영화 말미에 자신을 납치해서 가둔 장본인을 만나서 이러한 이야기를 듣지요.

“ 당신의 진짜 실수는 대답을 못 찾은게 아냐. 자꾸 틀린 질문을 하니까 맞는 답이 나올리 없잖아. 왜 오대수를 가두었느냐가 아니라, 왜 풀어줬을까 란 말이야 “

위의 본문에 나온 남편이 일곱있는 여인에 대한 질문은, 아이러니 하게도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파 사람들에게서 나온 질문입니다. 즉, 부활은 없다라고 믿는 사람들이, 부활의 때에 난처한 상황을 만들어 질문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부활이 없다는것을 증명하려는 목적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부활을 이야기하는 예수님을 궁지로 몰려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확실한것은 그들이 진정으로 이 질문에 대해서 궁금해 했다는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질문을 바꾸어 버리십니다. 모세오경만을 인정했던 사두개파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읽어보지 않았느냐? 하시며 모세오경 이외의 다른곳에서 나타난 부활에 대한 부분을 상기시키십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느님께서 관심을 두고 계시는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임을 강조하십니다.

그렇다면 위로부터의 질문은 무엇이고, 아래로 부터의 질문은 무엇일까요?

나웬 신부님께서 아래로 부터의 질문을 언급하시면서 ‘Legalistic’ 즉 율법적인 질문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법’이라는것에 대해 생각을 해 봐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을 때리는것은 잘못된것이라 여기고 대부분의 경우 법적인 제재가 있을수 있습니다.

하지만, 권투경기에서 사람을 때리는것을 잘못된것이라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법적인 문제는 전혀 없습니다.

분명히 ‘사람을 때린다’ 라는 행위는 같은것인데 하나는 불법이고 또 하나는 합법입니다. 다시말해서 법이란 그 내용보다는 상황에 더 큰 무게를 두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위 본문의 예에서의 사두개파 사람들은 상황보다는 모세의 법률에 근거한 내용을 더 중시한 질문을 한 경우가 되겠고요.

또한 법의 존재 이유는 사람들간의 원활한 관계를 위한것입니다. 당연히 사람들이 법을 위한것이 아닙니다. 모세의 율법도 자식없이 살아가야 할 불쌍한 과부를 위한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특별한 돌봄이 필요한 약자였던 과부의 상황을 부활의 존재 여부를 왜곡하고 자신의 입지를 주장하기 위해 사용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주객이 전도가 된 셈입니다.

모세오경에 나와있는 수많은 율법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느님의 사랑을 tangible 하게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상황’에 맞게 풀어서 적용할 사람들도 하느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줄 아는 사람이어야 했고요.

그런데, 그것이 나의 목적을 위해서 바뀔때, 그것은 하느님의 소리대신 나의 소리를 듣는 것이 되어버리고, 곧 아래로부터의 질문이 되어 버리는것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의 답은 ‘나의’ 답이 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신부님께서 자주 언급하셨지만,

땅을 일구고 농사를 지으면서 가장 크게 느끼셨다는것이, 다른 일들과는 다르게 하늘의 결정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위로부터의 질문.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바탕을 둔 질문이 아닐까 합니다.

0 Comments

Add a Comment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d bloggers like this: